은혜나눔



은혜 나눔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새소망교회
2026-09-13
조회수 24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한복음5:1-9)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말씀을 즐기다, 말씀을 걷다.’이다. 

2026년을 시작하면서 2주간에 걸쳐 하나하나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말씀을 즐기면 말씀을 따라 걷기 마련이다. 

2026년이 빠르게 지나 벌써 9월 둘째 주에 이르렀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까지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가? 

아니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걷고 있는가?

 

인간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가 직립이족보행이다. 

인간은 두 발로 걷는다. 

그것도 인간은 척추를 지면과 수직으로 꼿꼿이 세우고 두 발로 걷는다. 

이것이 바로 직립이족보행이다. 

직립이족보행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인간은 길 위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걷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할라크’이다. 

할라크의 기본적인 의미는 ‘걷다’, ‘가다’이다. 

또한 ‘행하다’, ‘따르다’, ‘동행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도,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도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홀로 걷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존재,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 

말씀을 길로 삼아 걸을 때, 말씀을 따라 걸을 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2026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말씀을 따라 걸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인간은 길 위로 부름을 받았는데, 직립이족보행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는데, 

오늘 본문에 안타깝게도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자에 이어 우리가 세 번째로 살펴볼 38년 된 병자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양문’ 곁 베데스다로 향하셨다.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듯이 의도적으로 양문 곁 베데스다로 항하셨다. 

양문이란 말 그대로 양들이 출입하는 문이다. 

그것도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질 양들이 출입하는 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문은 어린 양의 희생과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상징하는 문이다. 

 

양문 바로 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베트와 헤세드의 합성어이다. 

베트는 집을 뜻하며, 헤세드는 자비, 긍휼, 은혜를 뜻한다.

따라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긍휼의 집, 은혜의 집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곳에 병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요한은 그중에서 대표적인 병자들만 소개한다.

본문 3절.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맹인, 다리 저는 사람(지체장애인), 혈기 마른 사람(중풍병자) 

이들의 공통점은 중환자들이다. 

양문과 베데스다가 상징하듯 이들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했다. 

 

자, 그렇다면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이렇듯 많은 병자들이, 

그것도 중환자들이 모여든 까닭이 무엇인가?

대괄호 안에 있는 3절 후반부와 4절을 함께 읽자.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 부분이 대괄호로 묶여 있는 이유는 다른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NIV 영어성경에도 이 부분은 없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든 까닭은 무엇인가? 

진위를 알 수 없는 카더라 통신 때문이다. 

내용인즉슨 천사가 가끔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 데,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는 어떤 병이든 낫게 된다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 전설이 있었다는 거다. 

물론 38년 된 병자를 비롯해 현장에 있었던 많은 병자들은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곳에 모인 많은 병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주목한다.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바로 자신의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38년 된 병자다. 

카더라 통신이 사실이라면 그는 결코 자력으로 병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상태다. 


여러분, 병원에 입원해서 일주일만 누워 있어도 얼마나 괴로운가? 

그런데 그는 한두 달도 아니고, 1, 2년도 아니고 무려 38년 동안 누워만 있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한다면, 그렇게 평생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니 그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수천 번도, 수만 번도 생각했을 거다. 

가족들도 오래전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는 이제 병 고칠 생각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도 포기했을 거다. 

지나가는 사람이 던져주는 음식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을 거다. 

무기력, 절망, 그리고 원망 이 세 단어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바로 38년 된 병자의 삶 속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신다.

본문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단박에 아셨다. 

그리고 묻는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다. 

낫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꺾여버린 그에게 다시 낫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일깨우는 질문이다.

 

38년 된 병자는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본문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물어보는 질문에, 

그는 생뚱맞게 자신이 지금까지 병이 낫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병 고침을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병이 낫는다. 

그런데 자신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따라서 누군가 자신을 들어 넣어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 몸부림치며 기어 가지만 그동안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린다는 거다. 

가장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없기에 지금까지 고침을 받을 수 없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예수님께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다.

"낫고 싶죠. 저도 정말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십시오.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나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내가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베데스다의 실상을 보게 된다. 

38년 된 병자의 말은 온갖 기대와 희망으로 사람들(병자들)을 끌어들인 

베데스다가 실상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와도 같다.


천사가 미리 알려주고 내려오면 좋겠는데, 천사가 언제 내려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지, 석 달을 기다려야 하는지, 1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아침에 내려오는지, 오후에 내려오는지, 밤에 내려오는지, 새벽에 내려오는지 예측불허이다.

더욱이 맨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나음을 입을 뿐이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원리가 작동되는 공간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우연성 그리고 무한경쟁만이 작동하는 끔찍한 공간이다. 

 

베데스다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데, 

과연 누가 제일 먼저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들어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면 베데스다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가장 덜 아픈 사람, 

가장 멀쩡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베데스다가 정녕 그 이름에 합당하게 은혜의 연못이 되려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은총을 누리도록 넉넉히 베풀었어야 옳을 것이다. 

만약 그런 규칙에 의해 베데스다가 운영되었다면, 거기에는‘38년 된 병자’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베데스다의 규칙은 단 하나였는데, 그게 뭔가? 

선착순이다. 

그렇게 보면 자비의 집 베데스다는 승자독식주의, 선착순 구원론이 지배하는 무지비한 집이었다. 

성공한 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과 무력증 

그리고 깊은 절망에 시달렸던 냉정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신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놀랍게도 그는 치유된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그는 진정한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일어선 게 아니다. 

1등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찾아오셨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셨고, 아셨고, 말을 걸어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를 고쳐주셨다. 


그가 먼저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고쳐주소서’라고 간절히 외치지도 않았다.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죠.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셨다. 

이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게 진정한 베데스다가 아니겠는가?


하여 그는 이제 직립이족보행이 가능해졌다. 

길 위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할라크,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2026년이 빠르게 지나 벌써 9월 둘째 주에 이르렀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까지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가? 

아니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걷고 있는가? 

길 위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서 걷고 있는가? 

하나님과 할라크 동행하고 있는가? 

말씀을 길로 삼아 걷고 있는가?

 

혹 38년 된 병자처럼 오래전부터 걷기를 포기하고 누워만 있지는 않은가? 

영적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영적 무기력증 빠져 있지는 않은가?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환경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내가 1등만 하면, 내가 승진만 하면, 내가 떼돈만 벌면, 

내가 아파트 평수를 넓히기만 하면 일어나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런 방식으론 결코 일어나 걸을 수 없다. 


우리는 은혜로만 일어설 수 있다. 

은혜로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은혜로만 말씀을 길로 삼아 걸을 수 있다.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셨듯이, 오늘 우리를 찾아오시며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최근 헤븐 까페를 오픈했다. 

까페를 오픈하면서 커피 믹스를 무료로 셋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 

결론은 그대로 커피 믹스는 그대로 두기로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은혜의 집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당연히 교회가 커피를 공짜로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하시면 안된다. 

우리 교회는 밥도 공짜다. 

예산이 많아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은혜의 식탁을 누리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은혜의 특징은 흐른다는 것이다. 

은혜를 맛보면 그 은혜가 내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디론가 흘러간다. 

은혜가 흘러갈 때 우리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26년 남은 시간, 은혜를 흘려보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54559 전라북도 익산시 선화로 73길 25-3 (부송동)

TEL. 063-833-4647  E-mail. ssmj29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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