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0-2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자주 듣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다.
우리는 이 시간에도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모여 있다.
누구를 예배하기 위함인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알지도 못한 분을 예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를 받으시는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하는가?
예배를 꼭 드려야 하는가?
예배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 주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데,
이 질문들은 우리가 반드시 응답해야 할 핵심 질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라는 맥락속에서 선포된 말씀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맥락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잠시 우물 곁에 앉으셨다.
그때가 정오 낮 12시쯤 되었는데,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
사마리아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그 시간에 왔건만, 뜻밖의 사람을 마주한 거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였고,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유대인이었다.
상당히 당황스럽고 불편했을 거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조용히 그리고 서둘러 우물에서 물을 긷고 현장에서 빠져나가려 했을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한다.
예수님이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 것이다.
더욱이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급격, 충격, 파격이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하셨으니,
물 이야기를 통해, 생수 이야기를 통해 대화를 이어가신다.
대화의 달인인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정확히 짚으시고
다음과 같은 솔루션을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요한복음 4장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뙤약볕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물을 길으러 와야 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보다 더 솔깃한 솔루션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즉각 반응한다.
요한복음 4장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은 여자가 생각하는 물과 전혀 다른 차원의 물이다.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여기서 갑작스럽게 남편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에도 깜빡이를 켜지 않고 훅 들어온 거다.
우리는 저마다 숨기고 싶고, 은폐하고 싶은 영역이 있다.
그것을 상처라고 해도 무방하다.
남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게 쉽지 않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상처를 직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감탄사가 있다.
‘헐!!’
화들짝 놀란 사마리아 여자는 대화의 주제를 남편 이야기에서 예배 이야기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 맥락속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는 구절이 언급된다.
자, 정리해 보자.
대화의 주제가 처음에는 물 곧 생수이야기로 시작했다.
생수 이야기가 남편이야기로, 남편 이야기가 예배 이야기로 전환된다.
너무나 갑작스럽고도 변화무쌍하다.
그런데 본문을 밑바닥의 흐름을 살펴보면 사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먼저 물 곧 생수 이야기를 통해 사마리아 여자를 대화로 끌어들이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혹할 만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소개한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은 육체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물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목마름, 곧 영적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지금까지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그게 남편이다.
남편이라는 우물을 계속 판 것이다.
남편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을 통해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했다.
그러니 남편 이야기로 대화의 주제가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예수님은 남편이 정답이 아님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마리아 여자도 남편이라는 우물이
자신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갈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자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성령이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밝혀 주셨듯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성령이야말로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다.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성령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현장이 어디인가?
그게 바로 예배의 현장이다.
그래서 남편 이야기는 예배 이야기로 마무리 될 수밖에 없다.
자, 이 부분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묻는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배에 관한 사마리아 여자의 관심사는 장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으로 그리심산을 신성시 여겼고 이곳에서 예배했다.
반면 유대인들은 솔로몬 성전 곧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의 핵심은
예배의 합당한 장소가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 물은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은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특별한 장소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장소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아무 데서나 예배할 수 없고,
특별한 장소, 정해진 장소, 신성한 장소에서만 예배해야 하는가?
자, 사마리아 여자가 장소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의 장소, 예배의 처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때”를 말씀하신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할 때가 중요하다는 거다.
예수님은 23절에서 예배할 때에 대해 다시 언급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한 이유가 뭔가?
참되게 예배하는 게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배하든, 저기서 예배하든 참되게 예배하는 게 예배를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하기만 하면 장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가 지금 왔다는 거다.
그때란 구체적으로 어떤 때인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면 이전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자, 여기서 예수님은 왜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밝히신다.
여기서 예배해야 하느냐?
저기서 예배해야 하느냐, 장소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장소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중요한 게, 참되게 예배하는 것, 진실되게 예배하는 것,
진정으로 예배하는 게 중요한 거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껍데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진솔한 내면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참되게 예배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도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러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가 모호할 땐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된다.
영과 진리의 반대말은 육과 거짓이다.
육과 거짓으로 드리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껍데기만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것,
이건 참된 예배가 아니라는 거다.
자, 이제 좀 더 깊숙이 본문의 의미를 들여다보자.
먼저,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서 성령님이 안 계시면 예배할 수 없다.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만 우리는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하는 게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 몸이 이곳에 앉아 있다고 자동적으로 예배가 드려지는 게 아니다.
성령님의 이끌림 속에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 감화를 따라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기도 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면서 예배하는 것,
이것이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진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게다가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넓게 보면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니까, 진리는 성령님으로 해석도 무방하다.
진리가 예수님을 가리키든, 말씀을 가리키든, 성령님을 가리키든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지기에, 오늘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고자 한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때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는 의미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물 제사와 성전 시스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의 핵심인 지성소로 들어갈 순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으로서 예배한다는 것이다.
저 멀리 계신, 저 천상에 계신, 저 우주 밖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다가 가는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 아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접촉하고 사귀는 예배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들을 찾고 찾으시는 것이다.
앞서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바로 이때가 온 것이다.
영 곧 성령과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할 때가 온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예배가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새 시대가 왔으니,
더 이상 장소에 얽매이지 말고,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참되게 예배하라는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예배, 성령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예배,
성령의 생수의 강이 넘치는 예배, 성령님의 감동 감화 부어지는 예배,
하나님과 만남으로서의 예배, 하나님의 깊은 터치를 맛보는 예배,
그런 예배, 참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에도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모여 있다.
누구를 예배하기 위함인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알지도 못한 분을 예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를 받으시는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하는가?
예배를 꼭 드려야 하는가?
예배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들어보시라.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되게 예배할 때가 이미 2000년전에 도래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이미 2000년전에 도래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이미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도래했다.
그때가 이미 왔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그런 예배는 아닌가?
정작 나는 죽지 않고 짐승만 죽이는 그런 예배는 아닌가?
제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예배는 아닌가?
장소에 따라 예배의 자세가 태도가 바뀌는 그런 예배는 아닌가?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에 얽매이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령님의 부단한 감동 감화를 따라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는
그런 예배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0-2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자주 듣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다.
우리는 이 시간에도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모여 있다.
누구를 예배하기 위함인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알지도 못한 분을 예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를 받으시는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하는가?
예배를 꼭 드려야 하는가?
예배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 주일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데,
이 질문들은 우리가 반드시 응답해야 할 핵심 질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라는 맥락속에서 선포된 말씀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맥락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잠시 우물 곁에 앉으셨다.
그때가 정오 낮 12시쯤 되었는데,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
사마리아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그 시간에 왔건만, 뜻밖의 사람을 마주한 거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였고,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유대인이었다.
상당히 당황스럽고 불편했을 거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조용히 그리고 서둘러 우물에서 물을 긷고 현장에서 빠져나가려 했을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한다.
예수님이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 것이다.
더욱이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급격, 충격, 파격이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하셨으니,
물 이야기를 통해, 생수 이야기를 통해 대화를 이어가신다.
대화의 달인인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정확히 짚으시고
다음과 같은 솔루션을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요한복음 4장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뙤약볕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물을 길으러 와야 하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보다 더 솔깃한 솔루션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는 즉각 반응한다.
요한복음 4장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은 여자가 생각하는 물과 전혀 다른 차원의 물이다.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여기서 갑작스럽게 남편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에도 깜빡이를 켜지 않고 훅 들어온 거다.
우리는 저마다 숨기고 싶고, 은폐하고 싶은 영역이 있다.
그것을 상처라고 해도 무방하다.
남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게 쉽지 않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상처를 직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감탄사가 있다.
‘헐!!’
화들짝 놀란 사마리아 여자는 대화의 주제를 남편 이야기에서 예배 이야기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 맥락속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는 구절이 언급된다.
자, 정리해 보자.
대화의 주제가 처음에는 물 곧 생수이야기로 시작했다.
생수 이야기가 남편이야기로, 남편 이야기가 예배 이야기로 전환된다.
너무나 갑작스럽고도 변화무쌍하다.
그런데 본문을 밑바닥의 흐름을 살펴보면 사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먼저 물 곧 생수 이야기를 통해 사마리아 여자를 대화로 끌어들이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혹할 만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소개한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은 육체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물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목마름, 곧 영적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지금까지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그게 남편이다.
남편이라는 우물을 계속 판 것이다.
남편이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을 통해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했다.
그러니 남편 이야기로 대화의 주제가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예수님은 남편이 정답이 아님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마리아 여자도 남편이라는 우물이
자신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갈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자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성령이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밝혀 주셨듯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성령이야말로
우리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다.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성령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현장이 어디인가?
그게 바로 예배의 현장이다.
그래서 남편 이야기는 예배 이야기로 마무리 될 수밖에 없다.
자, 이 부분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묻는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배에 관한 사마리아 여자의 관심사는 장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으로 그리심산을 신성시 여겼고 이곳에서 예배했다.
반면 유대인들은 솔로몬 성전 곧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의 핵심은
예배의 합당한 장소가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 물은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은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특별한 장소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장소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아무 데서나 예배할 수 없고,
특별한 장소, 정해진 장소, 신성한 장소에서만 예배해야 하는가?
자, 사마리아 여자가 장소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의 장소, 예배의 처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때”를 말씀하신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할 때가 중요하다는 거다.
예수님은 23절에서 예배할 때에 대해 다시 언급하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한 이유가 뭔가?
참되게 예배하는 게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배하든, 저기서 예배하든 참되게 예배하는 게 예배를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하기만 하면 장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가 지금 왔다는 거다.
그때란 구체적으로 어떤 때인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면 이전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자, 여기서 예수님은 왜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밝히신다.
여기서 예배해야 하느냐?
저기서 예배해야 하느냐, 장소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장소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중요한 게, 참되게 예배하는 것, 진실되게 예배하는 것,
진정으로 예배하는 게 중요한 거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껍데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진솔한 내면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참되게 예배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도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러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가 모호할 땐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된다.
영과 진리의 반대말은 육과 거짓이다.
육과 거짓으로 드리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껍데기만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것,
이건 참된 예배가 아니라는 거다.
자, 이제 좀 더 깊숙이 본문의 의미를 들여다보자.
먼저,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서 성령님이 안 계시면 예배할 수 없다.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만 우리는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하는 게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 몸이 이곳에 앉아 있다고 자동적으로 예배가 드려지는 게 아니다.
성령님의 이끌림 속에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 감화를 따라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기도 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면서 예배하는 것,
이것이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진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게다가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넓게 보면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니까, 진리는 성령님으로 해석도 무방하다.
진리가 예수님을 가리키든, 말씀을 가리키든, 성령님을 가리키든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모아지기에, 오늘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고자 한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때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다는 의미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물 제사와 성전 시스템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의 핵심인 지성소로 들어갈 순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으로서 예배한다는 것이다.
저 멀리 계신, 저 천상에 계신, 저 우주 밖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다가 가는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 아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접촉하고 사귀는 예배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들을 찾고 찾으시는 것이다.
앞서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때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바로 이때가 온 것이다.
영 곧 성령과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할 때가 온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영과 진리로 예배가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새 시대가 왔으니,
더 이상 장소에 얽매이지 말고,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참되게 예배하라는 것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예배, 성령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예배,
성령의 생수의 강이 넘치는 예배, 성령님의 감동 감화 부어지는 예배,
하나님과 만남으로서의 예배, 하나님의 깊은 터치를 맛보는 예배,
그런 예배, 참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에도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모여 있다.
누구를 예배하기 위함인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알지도 못한 분을 예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되는가?
주보에 나온 순서대로 예배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를 받으시는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하는가?
예배를 꼭 드려야 하는가?
예배는 무엇인가?
다시 한번 들어보시라.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되게 예배할 때가 이미 2000년전에 도래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이미 2000년전에 도래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이미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도래했다.
그때가 이미 왔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그런 예배는 아닌가?
정작 나는 죽지 않고 짐승만 죽이는 그런 예배는 아닌가?
제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예배는 아닌가?
장소에 따라 예배의 자세가 태도가 바뀌는 그런 예배는 아닌가?
하나님을 특정한 장소에 얽매이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령님의 부단한 감동 감화를 따라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는
그런 예배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