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요한복음 3:1-5)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우리가 살펴볼 사람은 니고데모이다.
1절에 보면 니고데모에 관한 두 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지도자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 전문가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도 인정하는 바이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그는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가르쳤던 전문가였다.
물론 종교적 열성도 대단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유대인 지도자에 각주가 달려 있다.
각주를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되어 있다.
니고데모는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최고 권력기관에 소속된 공회원이었다.
그는 당시 유대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에 올랐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거머쥔 최고의 엘리트였다.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본문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뭘까?
낮에는 예수님이 바쁘시기 때문일까?
아니면 밤에 만나기로 약속한 것일까?
일단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뭔가?
2절 후반부를 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일단 니고데모의 관심사는 표적이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 거의 모세급, 엘리야급 표적을 행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서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서야 행할 수 없는 수준의 표적을 행한 것이다.
더욱이 많은 표적을 행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보이는 행동들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2장에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온갖 짐승들을 쫒아내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렇듯 상당히 도발적이고 과격하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신성 모독적인 언동이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죄인들과는 어울리셨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은 전통 파괴자요, 율법 파괴자로 보였을 것이다.
이게 헷갈리는 거다.
예수님의 과격하고도 도발적인 언동을 보면 그냥 불온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신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 같은 아우라가 강력히 느껴진다.
이게 헷갈리는 거다.
예수는 이단아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인가?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말속에 감추어진 니고데모의 속마음은 무엇인가?
그런데 당신의 행동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표적에 반하는 당신의 언동을 이해할 수 없다.
자,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율법 파괴자로, 신성 모독자로, 죄인들과 어울리는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예수를 낮에 만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지위나 체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예수와 한 패거리라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스캔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밤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인 시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밤’은 니고데모의 영적인 상태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는 실상 밤의 어둠 아래 놓여 있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가 지독한 어둠 가운데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잠깐 살펴보자.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상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했던 첫 마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그런데 정작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율법에 정통하고, 권력의 최고봉에 이른 그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율법 전문가인 그는 하나님 나라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그토록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고 고대했던,
종교적 열심이 대단했던 니고데모만큼은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교적 엘리트요,
정치적 엘리트인 그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왜? 그는 실상 영적 어둔 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헷갈린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예수님의 과격하고도 도발적인 행보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기야 어둠 속에서 무엇을 제대로 볼 수 있었겠는가?
요한복음의 저자는 훗날 니고데모를 언급할 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요한복음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게 바로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두 번째 이유다.
그는 자신 안에 감추어진 어둠을 본 것이다.
종교적 열심으로도, 해박한 율법 지식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어둠을 본 것이다.
그것을 영적인 갈증, 목마름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가르쳤지만, 성전 체제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어둠을 제거할 수 없었다.
밑바닥부터 최고봉까지 쌓아 올린 화려한 이력도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어둠을 가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적 갈증과 목마름을 해갈 수 없었다.
그러니 그의 삶의 풍경이 어떠한가?
그의 이력은 분명 대낮을 살고 있는데, 그의 영혼은 지독한 밤을 지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돈과 명예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니고데모라는 그리스식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국제적 감각까지 갖춘 인재였다.
더욱이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선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은 분명 찬란한 대낮이다.
빛이 충만한 삶이다.
번쩍이는 인생이다.
그런데 그의 내면은 어떠한가?
잠자리에 누웠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도 잠을 이를 수 없다.
자신의 종교 행위는 너무 무미건조하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목마름 때문에 너무나 괴롭다.
그러니 그의 인생은 분명 어두운 밤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의 껍데기는 대낮이지만, 그의 내면은 지독한 밤이다.
이런 불일치가 주는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풍경은 어떠한가?
얼핏 보면 우리는 모두 대낮처럼 살아가는 것 같다.
유독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부러우면 지는데 부러운 사람이 있다.
사실 카톡이나 인스타 같은 SNS만 보면 다들 너무 찬란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내면의 풍경도 낮일까?
너무 찬란한 인생을 살고 있는데, 지독한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가정의 문제로 영혼의 어둠 밤을 지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밤마다 공허함과 외로움과 불안과 두려움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버둥 쳐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목마름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우리가 피라미드 꼭대기로 이동하려는 이유는 뭔가?
우리가 몸이 상할 정도로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유는 뭔가?
그렇게 하면 내 목마름이 해갈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내 안에 어두운 풍경을 제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제거해 줄 수는 없어도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낮과 밤이 교차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낮과 밤이 공존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겉과 속의 불일치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본문의 니고데모는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밤에 30대 초반 청년 예수를 찾아온다.
다른 이들에게서 느껴볼 수 없는 권위가 발산되고,
모세와 엘리야급 표적을 행하는 예수라면
뭔가 자신에게 정답지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그리고 니고데모의 막연한 기대는 기쁨과 소망과 확신으로 바뀐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 인생이 밤이라면 반드시 예수님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밤이니까 가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를 알고 있다.
내 내면의 풍경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듯이 내면이 어둠이라면 우리는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아니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님께 가야 한다.
우울증 환자가 처음으로 전문가를 찾아 치료를 받는 데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이
약 1년 7개월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생각보다 병원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증상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병원 치료를 안 받는 분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지독한 밤이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예수님께 안 가시는 분들이 많다.
계속해서 치료와 회복을 미루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실제 예수님께로 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내 안의 어둠을 인지했다면 빨리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
모든 걸 제쳐두고라도 예수님께로 가는 게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증상을 키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예수님 외에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우리가 밤에 예수님께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기꺼이 맞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밤에 왔냐고 타박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피곤하니까 내일 낮에 오라고 돌려보내시지 않으셨다.
지독한 밤을 살아가고 있는 니고데모를 기꺼이 받아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시다.
비서나 경호원을 거치지 않고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내 지독한 어둠을 기꺼이 받아주시는 분이시다.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낮이든, 밤이든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잠 못 이루는 그 밤에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남몰래 눈물 흘리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빛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반드시 몰아내실 것입니다. -아멘-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요한복음 3:1-5)
오늘부터 요한복음을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우리가 살펴볼 사람은 니고데모이다.
1절에 보면 니고데모에 관한 두 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지도자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 전문가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도 인정하는 바이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그는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을 가르쳤던 전문가였다.
물론 종교적 열성도 대단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유대인 지도자에 각주가 달려 있다.
각주를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되어 있다.
니고데모는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최고 권력기관에 소속된 공회원이었다.
그는 당시 유대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에 올랐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까지 거머쥔 최고의 엘리트였다.
무엇에도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본문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뭘까?
낮에는 예수님이 바쁘시기 때문일까?
아니면 밤에 만나기로 약속한 것일까?
일단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뭔가?
2절 후반부를 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일단 니고데모의 관심사는 표적이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 거의 모세급, 엘리야급 표적을 행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서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고서야 행할 수 없는 수준의 표적을 행한 것이다.
더욱이 많은 표적을 행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보이는 행동들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2장에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온갖 짐승들을 쫒아내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렇듯 상당히 도발적이고 과격하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신성 모독적인 언동이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죄인들과는 어울리셨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은 전통 파괴자요, 율법 파괴자로 보였을 것이다.
이게 헷갈리는 거다.
예수님의 과격하고도 도발적인 언동을 보면 그냥 불온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신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 같은 아우라가 강력히 느껴진다.
이게 헷갈리는 거다.
예수는 이단아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인가?
도대체 그의 정체는 뭘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말속에 감추어진 니고데모의 속마음은 무엇인가?
그런데 당신의 행동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표적에 반하는 당신의 언동을 이해할 수 없다.
자,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율법 파괴자로, 신성 모독자로, 죄인들과 어울리는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예수를 낮에 만난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지위나 체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예수와 한 패거리라는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스캔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밤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인 시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밤’은 니고데모의 영적인 상태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는 실상 밤의 어둠 아래 놓여 있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가 지독한 어둠 가운데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잠깐 살펴보자.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상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했던 첫 마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그런데 정작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율법에 정통하고, 권력의 최고봉에 이른 그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율법 전문가인 그는 하나님 나라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그토록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고 고대했던,
종교적 열심이 대단했던 니고데모만큼은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교적 엘리트요,
정치적 엘리트인 그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다.
왜? 그는 실상 영적 어둔 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헷갈린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예수님의 과격하고도 도발적인 행보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기야 어둠 속에서 무엇을 제대로 볼 수 있었겠는가?
요한복음의 저자는 훗날 니고데모를 언급할 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요한복음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게 바로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두 번째 이유다.
그는 자신 안에 감추어진 어둠을 본 것이다.
종교적 열심으로도, 해박한 율법 지식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어둠을 본 것이다.
그것을 영적인 갈증, 목마름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가르쳤지만, 성전 체제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어둠을 제거할 수 없었다.
밑바닥부터 최고봉까지 쌓아 올린 화려한 이력도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어둠을 가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적 갈증과 목마름을 해갈 수 없었다.
그러니 그의 삶의 풍경이 어떠한가?
그의 이력은 분명 대낮을 살고 있는데, 그의 영혼은 지독한 밤을 지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돈과 명예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니고데모라는 그리스식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국제적 감각까지 갖춘 인재였다.
더욱이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선망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은 분명 찬란한 대낮이다.
빛이 충만한 삶이다.
번쩍이는 인생이다.
그런데 그의 내면은 어떠한가?
잠자리에 누웠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도 잠을 이를 수 없다.
자신의 종교 행위는 너무 무미건조하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목마름 때문에 너무나 괴롭다.
그러니 그의 인생은 분명 어두운 밤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의 껍데기는 대낮이지만, 그의 내면은 지독한 밤이다.
이런 불일치가 주는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풍경은 어떠한가?
얼핏 보면 우리는 모두 대낮처럼 살아가는 것 같다.
유독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부러우면 지는데 부러운 사람이 있다.
사실 카톡이나 인스타 같은 SNS만 보면 다들 너무 찬란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과연 내면의 풍경도 낮일까?
너무 찬란한 인생을 살고 있는데, 지독한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가정의 문제로 영혼의 어둠 밤을 지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밤마다 공허함과 외로움과 불안과 두려움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버둥 쳐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목마름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우리가 피라미드 꼭대기로 이동하려는 이유는 뭔가?
우리가 몸이 상할 정도로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유는 뭔가?
그렇게 하면 내 목마름이 해갈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이 내 안에 어두운 풍경을 제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제거해 줄 수는 없어도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낮과 밤이 교차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낮과 밤이 공존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겉과 속의 불일치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본문의 니고데모는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밤에 30대 초반 청년 예수를 찾아온다.
다른 이들에게서 느껴볼 수 없는 권위가 발산되고,
모세와 엘리야급 표적을 행하는 예수라면
뭔가 자신에게 정답지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그리고 니고데모의 막연한 기대는 기쁨과 소망과 확신으로 바뀐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 인생이 밤이라면 반드시 예수님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밤이니까 가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나를 알고 있다.
내 내면의 풍경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듯이 내면이 어둠이라면 우리는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아니 모든 걸 내려놓고 예수님께 가야 한다.
우울증 환자가 처음으로 전문가를 찾아 치료를 받는 데까지 걸리는 평균 시간이
약 1년 7개월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생각보다 병원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증상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병원 치료를 안 받는 분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지독한 밤이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예수님께 안 가시는 분들이 많다.
계속해서 치료와 회복을 미루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실제 예수님께로 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내 안의 어둠을 인지했다면 빨리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
모든 걸 제쳐두고라도 예수님께로 가는 게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증상을 키울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예수님 외에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우리가 밤에 예수님께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예수님은 기꺼이 맞아들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밤에 왔냐고 타박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피곤하니까 내일 낮에 오라고 돌려보내시지 않으셨다.
지독한 밤을 살아가고 있는 니고데모를 기꺼이 받아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시다.
비서나 경호원을 거치지 않고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내 지독한 어둠을 기꺼이 받아주시는 분이시다.
결코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낮이든, 밤이든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잠 못 이루는 그 밤에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남몰래 눈물 흘리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빛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반드시 몰아내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