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벗으라
위 그림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이다. 탕자의 죄보다 큰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를 품고 있는 장면이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 어떠한가? 죄수처럼 삭발한 채 누더기 옷을 걸치고 낡은 샌들을 신고 있다. 특히 그의 발을 주목해 보라. 샌들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들이 겨우 감싸고 있다. 그의 상처 난 발과 낡은 샌들은 그의 삶의 행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통렬히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푼다.
누가복음 15장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그것도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고, 가락지에, 새신까지 선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옷이든, 가락지든, 신이든, 이 모든 것은 신분 회복을 의미한다. 품꾼으로 받아만 주어도 감지덕지한데 다시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아들로서의 그의 위치와 신분을 온전히 회복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혹 이력서를 써본 경험이 있는가? 이력서의 사전적 정의는 이력을 적은 문서이다. 여기서 이력은 주로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력서를 한자로 풀이해 보면, 신발의 역사이다. 신발 이, 지날 력, 신발을 신고 지나온 역사, 신발을 신고 경험한 역사이다. 사실 인간은 걷기 시작한 때부터 신발을 신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신발과 함께 한 역사요, 곧 신발의 역사다.
여러분이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지난 한 주 동안 여러분의 삶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디를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렇게 보면 돌아온 탕자의 발에 신을 신기라는 명령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새신을 신기 위해서는 낡은 신은 버려야 한다. 죄의 이력을 버려야 한다. 과거의 삶을 버려야 한다. 욕망 추동적인 삶의 궤적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만 새신을 신고, 새로운 이력을 써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탕자 이야기가 들려주는 회개의 포인트다.
우리는 나그네 이력을 써 내려온 모세의 삶을 살펴보고 있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의 자식으로 애굽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력서의 첫 줄은 노예였다. 그러니 그는 첫 출발부터 나그네였다. 그는 노예의 신과 나그네의 신을 동시에 신고 태어난 셈이다. 그런데 그에게 신겨진 신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죽음의 신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는 매우 특이한 이력도 있었다. 실제 죽음의 신은 그를 죽음의 강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이름의 뜻처럼 죽음의 강 나일강에서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았다. 바로의 공주가 그를 건져 올린 것이다. 건져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자로 입양한다. 바로는 던졌지만, 그의 딸은 건져올린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노예의 신을 벗어 애굽 왕자의 신으로 갈아신고 새로운 이력을 써 내려간다. 모세 인생에 빛나고 화려한 이력들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분명 빛나고 화려한 왕자의 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벗지 못한 낡은 신이 하나 있었다. 그게 나그네 신이다. 나그네 신은 벗겨지지 않았다. 왕자의 신을 신고 있으면서 왕자의 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그네의 신을 동시에 신었으니, 그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벗으라는 압박감도 문든문득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결국 모세는 둘 중에 하나를 벗게 된다. 어떤 신을 벗게 되는가? 왕자의 신을 벗게 된다. 아니,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신고 있었던 나그네 신을 벗지 못한 것이다. 나그네 신을 벗을 수 없다는 현타가 오자, 그 현타를 첫째 아들의 이름에 새긴다. 그 이름이 바로 게르솜이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로 추방된 모세는 새로운 이력을 얻게 된다. 살인자에, 도망자라는 불미스러운 이력이 추가된 것이다.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이력임에 틀림없다. 이때 왕따라는 이력도 붙게 된다. 동족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했으니 말이다. 좌절과 무기력이라는 신도 신게 된다. 애굽의 왕자에서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광야 양치기로 추락했으니 말이다. 갑자기 따라붙는 이런 이력들은 모세가 수용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이력에 특이한 순간을 보여준다. 모세가 광야로 도주한지 어느 덧 40년이 흐른 어느 시점이다.
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어느 날 모세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다. 불붙은 가시나무 떨기를 본 것이다. 불타는 가시나물 떨기야 희한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자연 발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이 붙었으니, 가시나무 떨기가 타지 않았다. 더욱이 그 불꽃 가운데 천사가 보인 것이다. 하여 모세는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불붙은 가시나무 떨기 가까이 다가간다. 그때 모세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
32절.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놀랍게도 모세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시간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마주한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카이로스를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세의 시공간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생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하나님을 마주한 인간의 모든 반응이 그렇듯이 모세 역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모세의 귓전을 때린다.
33절.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첫 번째로 주문한 것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이다. 하나님이 다짜고짜 신을 벗으라고 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필 신을 벗어야 하는가?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대략 40년 후 여호수에게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한 주문을 하신다.
여호수아 5장 15절.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신을 벗으라 주문한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발 벗기기가 취미인 것인가? 왜 하필 신을 벗으라고 주문한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신발 벗기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 거꾸로 여호수아 신발 벗기기의 시점부터 살펴보자. 이때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진입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는 시점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미션을 착수해야 할 시점이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바야흐로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인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하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과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을까? 여호수아는 전투력 제로에 가까운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과연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 모세의 바통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자, 이어서 모세 신발 벗기기 시점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떨기에서 모세를 부르신 시점은 언제인가? 이제 막 출애굽의 구원역사가 시작될 시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출애굽의 구원역사로의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이때 모세 개인 내면의 풍경은 어떠한가? 열정도 패기도 사그라진지 오래되었다. 좌절감과 무기력에 휩싸인 채 자신감 제로의 시점이다. 출애굽이라는 미션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면의 풍경을 지닌 시점이다.
40년 전 동족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했던 상처를 지닌 모세가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고 리드할 수 있을까? 애굽 왕 바로와의 지난한 협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탈출할 수 있을까? 출애굽의 구원역사라는 미션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면, 여호수아든, 모세든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진 시점은 동일하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는 새로운 사명, 출애굽이라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진 시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주문은 사명의 신을 신으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새신을 갈아신기 위해선 낡은 신을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사명은 각자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주문은 동일하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낡은 신을 신고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다. 낡은 신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는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신을 신고 있는가? 슬리퍼를 신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빌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 이제 본문의 맥락속에서 신벌 벗기기의 의미를 조명해 보자.
다시 한 번 본문 33절을 들어보시라.
33절.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모세는 왜 신을 벗어야 하는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지금 모세가 밟고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기에 신을 벗으라는 거다.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무엇인가? 본래 거룩한 땅이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하셨기에 거룩한 땅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만 하면, 불모지 광야도 성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는 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이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예배당이 거룩한 현장이 되는 까닭도 거룩한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지금 신고 있는 신을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럴듯한 신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더기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벗어야 할 신은 무엇인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선 화려한 신도, 더러운 신도 벗어야 한다. 애굽 왕자라는 화려한 신도 벗어야 하고, 동족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한 상처의 신도, 불모지 광야가 빚어내는 깊은 좌절감과 무기력의 신도 벗어야 한다. 모세의 어두운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더러운 신을 벗어야 한다.
따라서 신을 벗으라는 요청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너의 모습 그대로, 포장하지도 말고, 가리지도 말고, 나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쌓아 올린 그 어떤 이력도, 스펙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이력서가 왜 필요하겠는가?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벗어야 할 신은 무엇인가? 누더기 같은 신을 신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벗고 또 벗자! 반만 벗지 말고 온전히 벗자! 낡고 더러운 신 벗기를 멈추지 말자!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상처와 죄악으로 얼룩진 추악한 맨발일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제일 좋은 옷으로, 가락지로, 새 신으로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세상의 신을 벗고, 하나님이 준비한 새 신을 신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신을 벗으라
위 그림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이다. 탕자의 죄보다 큰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를 품고 있는 장면이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 어떠한가? 죄수처럼 삭발한 채 누더기 옷을 걸치고 낡은 샌들을 신고 있다. 특히 그의 발을 주목해 보라. 샌들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들이 겨우 감싸고 있다. 그의 상처 난 발과 낡은 샌들은 그의 삶의 행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통렬히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푼다.
누가복음 15장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그것도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고, 가락지에, 새신까지 선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옷이든, 가락지든, 신이든, 이 모든 것은 신분 회복을 의미한다. 품꾼으로 받아만 주어도 감지덕지한데 다시 사랑하는 아들로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아들로서의 그의 위치와 신분을 온전히 회복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혹 이력서를 써본 경험이 있는가? 이력서의 사전적 정의는 이력을 적은 문서이다. 여기서 이력은 주로 학업, 직업, 경험 등의 내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력서를 한자로 풀이해 보면, 신발의 역사이다. 신발 이, 지날 력, 신발을 신고 지나온 역사, 신발을 신고 경험한 역사이다. 사실 인간은 걷기 시작한 때부터 신발을 신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신발과 함께 한 역사요, 곧 신발의 역사다.
여러분이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지난 한 주 동안 여러분의 삶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디를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렇게 보면 돌아온 탕자의 발에 신을 신기라는 명령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새신을 신기 위해서는 낡은 신은 버려야 한다. 죄의 이력을 버려야 한다. 과거의 삶을 버려야 한다. 욕망 추동적인 삶의 궤적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만 새신을 신고, 새로운 이력을 써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탕자 이야기가 들려주는 회개의 포인트다.
우리는 나그네 이력을 써 내려온 모세의 삶을 살펴보고 있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의 자식으로 애굽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력서의 첫 줄은 노예였다. 그러니 그는 첫 출발부터 나그네였다. 그는 노예의 신과 나그네의 신을 동시에 신고 태어난 셈이다. 그런데 그에게 신겨진 신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죽음의 신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는 매우 특이한 이력도 있었다. 실제 죽음의 신은 그를 죽음의 강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이름의 뜻처럼 죽음의 강 나일강에서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았다. 바로의 공주가 그를 건져 올린 것이다. 건져 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자로 입양한다. 바로는 던졌지만, 그의 딸은 건져올린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노예의 신을 벗어 애굽 왕자의 신으로 갈아신고 새로운 이력을 써 내려간다. 모세 인생에 빛나고 화려한 이력들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분명 빛나고 화려한 왕자의 신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벗지 못한 낡은 신이 하나 있었다. 그게 나그네 신이다. 나그네 신은 벗겨지지 않았다. 왕자의 신을 신고 있으면서 왕자의 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그네의 신을 동시에 신었으니, 그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벗으라는 압박감도 문든문득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결국 모세는 둘 중에 하나를 벗게 된다. 어떤 신을 벗게 되는가? 왕자의 신을 벗게 된다. 아니,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신고 있었던 나그네 신을 벗지 못한 것이다. 나그네 신을 벗을 수 없다는 현타가 오자, 그 현타를 첫째 아들의 이름에 새긴다. 그 이름이 바로 게르솜이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로 추방된 모세는 새로운 이력을 얻게 된다. 살인자에, 도망자라는 불미스러운 이력이 추가된 것이다.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이력임에 틀림없다. 이때 왕따라는 이력도 붙게 된다. 동족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했으니 말이다. 좌절과 무기력이라는 신도 신게 된다. 애굽의 왕자에서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광야 양치기로 추락했으니 말이다. 갑자기 따라붙는 이런 이력들은 모세가 수용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이력에 특이한 순간을 보여준다. 모세가 광야로 도주한지 어느 덧 40년이 흐른 어느 시점이다.
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어느 날 모세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다. 불붙은 가시나무 떨기를 본 것이다. 불타는 가시나물 떨기야 희한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자연 발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이 붙었으니, 가시나무 떨기가 타지 않았다. 더욱이 그 불꽃 가운데 천사가 보인 것이다. 하여 모세는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불붙은 가시나무 떨기 가까이 다가간다. 그때 모세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
32절.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놀랍게도 모세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시간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마주한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카이로스를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세의 시공간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생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하나님을 마주한 인간의 모든 반응이 그렇듯이 모세 역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모세의 귓전을 때린다.
33절.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첫 번째로 주문한 것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이다. 하나님이 다짜고짜 신을 벗으라고 명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필 신을 벗어야 하는가?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대략 40년 후 여호수에게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한 주문을 하신다.
여호수아 5장 15절.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신을 벗으라 주문한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신발 벗기기가 취미인 것인가? 왜 하필 신을 벗으라고 주문한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신발 벗기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 거꾸로 여호수아 신발 벗기기의 시점부터 살펴보자. 이때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진입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는 시점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미션을 착수해야 할 시점이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바야흐로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인 가나안 땅을 차지해야 하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과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을까? 여호수아는 전투력 제로에 가까운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과연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을까? 모세의 바통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자, 이어서 모세 신발 벗기기 시점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떨기에서 모세를 부르신 시점은 언제인가? 이제 막 출애굽의 구원역사가 시작될 시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출애굽의 구원역사로의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이때 모세 개인 내면의 풍경은 어떠한가? 열정도 패기도 사그라진지 오래되었다. 좌절감과 무기력에 휩싸인 채 자신감 제로의 시점이다. 출애굽이라는 미션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면의 풍경을 지닌 시점이다.
40년 전 동족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했던 상처를 지닌 모세가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고 리드할 수 있을까? 애굽 왕 바로와의 지난한 협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고 탈출할 수 있을까? 출애굽의 구원역사라는 미션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면, 여호수아든, 모세든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진 시점은 동일하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는 새로운 사명, 출애굽이라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진 시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주문은 사명의 신을 신으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새신을 갈아신기 위해선 낡은 신을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사명은 각자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주문은 동일하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낡은 신을 신고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다. 낡은 신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는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신을 신고 있는가? 슬리퍼를 신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빌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 이제 본문의 맥락속에서 신벌 벗기기의 의미를 조명해 보자.
다시 한 번 본문 33절을 들어보시라.
33절.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모세는 왜 신을 벗어야 하는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지금 모세가 밟고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기에 신을 벗으라는 거다.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무엇인가? 본래 거룩한 땅이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하셨기에 거룩한 땅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만 하면, 불모지 광야도 성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는 곳은 어디나 거룩한 땅이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예배당이 거룩한 현장이 되는 까닭도 거룩한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선 지금 신고 있는 신을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럴듯한 신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더기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벗어야 할 신은 무엇인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선 화려한 신도, 더러운 신도 벗어야 한다. 애굽 왕자라는 화려한 신도 벗어야 하고, 동족 이스라엘로부터 거절당한 상처의 신도, 불모지 광야가 빚어내는 깊은 좌절감과 무기력의 신도 벗어야 한다. 모세의 어두운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더러운 신을 벗어야 한다.
따라서 신을 벗으라는 요청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너의 모습 그대로, 포장하지도 말고, 가리지도 말고, 나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쌓아 올린 그 어떤 이력도, 스펙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이력서가 왜 필요하겠는가?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벗어야 할 신은 무엇인가? 누더기 같은 신을 신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벗고 또 벗자! 반만 벗지 말고 온전히 벗자! 낡고 더러운 신 벗기를 멈추지 말자!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상처와 죄악으로 얼룩진 추악한 맨발일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제일 좋은 옷으로, 가락지로, 새 신으로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세상의 신을 벗고, 하나님이 준비한 새 신을 신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