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나눔



은혜 나눔

보고 듣고 내려 왔노니

새소망교회
2023-09-02
조회수 221

보고 듣고 내려 왔노니


우리가 매 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첫 줄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무엇인가? “나는”이다. 이어지는 성자 예수님에 관한 고백과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강조점은 “내”가 믿는다는 거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지금 “내”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보다는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더 적합할 듯싶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은 예배 중에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머리되신 주님께서 묶어주신 한 몸으로, 한 공동체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한 몸으로, 한 공동체로 공동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할때에만 가능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앎과 경험과 고백의 토대 위에 공동의 신앙고백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아닌 먼저 “내”가 성부 하나님에 대해, 성자 예수님에 대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에 앞서 “홀로” 그리고 “단독자”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동체 신앙고백은 반드시 개인 신앙고백을 전제한다. 이제 매 주일 사도신경을 고백하실 때마다 고백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고백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을 유념하시며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믿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믿습니다”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는 “크레도”이다. 라틴어 “크레도(CREDO)”에서 영어 단어 “CREED” 신조, 신경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사실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은 “크레도”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CREDO”는 심장을 뜻하는 “COR”와 주다를 뜻하는 “DO”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크레도”의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내 심장을 주는 것이다. 내 심장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내 생명을 바치고, 내 중심을 바치고, 내 전부를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심장을 바치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내 심장을 바치면, 예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심장을 바치고, 예수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 주일 사도신경을 통해 나는 죽고 예수의 심장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믿음의 속뜻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시간은 오롯이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이다.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는 두렵고 떨리는 시간이다. 누군가의 믿음이 아니라 내 믿음을 고백하는 시간이다. 내가 믿는 바를 분명히 하는 시간이다. 내 심장을 바치는 시간이고, 내 중심을 바치는 시간이고, 내 생명을 바치는 시간이고, 내 전부를 바치는 시간이다. 내 안에 예수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순간순간 내 심장을 바치고, 예수의 심장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을 홀로, 일대일로, 그리고 단독적자로 경험했던 야곱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진행된다. 야곱은 불과 몇 초 차이로 쌍둥이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다. 창세기 25장 26절은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어머니 리브가의 태속에서부터 장자권을 얻기 위한 쌍둥이 형제의 싸움이 치열했던 것이다. 이후 장자권을 불과 몇 초 차이로 빼앗긴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그 장자권을 손아귀에 쥐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형을 속이고, 아버지까지 속여 장자권에 이어 아버지의 축복까지 가로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장밋빛 미래도 대박 인생도 아니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파란만장한 개고생 길이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훗날 야곱의 고백처럼 나그네 길과 험악한 세월이 펼쳐진다.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유숙하게 되는데, 돌베개 베고 잠을 자다가 신비한 꿈을 꾸게 된다. 땅과 하늘이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고, 주의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희한한 광경을 본 것이다. 이때 야곱은 사닥다리 꼭대기에 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렷한 음성을 듣는다. 


창세기 28장 13~15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시간에 하나님을 경험한다. 친절하게 하나님은 야곱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한다. 어떻게 소개하는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야곱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었고, 이삭이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었지,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자신과는 무관한 하나님이었을 뿐이었다. 옛날이야기 속의 하나님이었을 뿐이다.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야곱은 사닥다리 꿈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난 것이다. 옛날이야기 속에만 등장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삶 속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나를 주목하시고, 나를 향한 구체적인 삶의 계획표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야곱은 그의 생애 최초 하나님을 홀로, 단독자로 대면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돌베개에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 불렀다. 이후 야곱의 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하나님을 단독자로 만난 벧엘 경험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산헤드린 법정 앞에 선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고 있다. 우리는 지난주에 생애 처음 하나님을 홀로 대면한 모세의 소명 사건을 살펴보았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주한 지 어느 덧 40년이 흘렀다. 어느 날 모세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한다. 불이 붙었으나 불타 소멸되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를 본 것이다. 그 광경을 가까이 보려고 다가선 순간 자신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낯선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의 주인은 곧 밝혀진다.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 

 

놀랍게도 모세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마주한 것이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생전 처음 마주한 것이다. 어머니 이야기 속에서 존재했던 하나님을 단독자로 대면한 것이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드디어 눈과 귀로 마주한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압도당한 모세는 큰 두려움에 휩싸였고, 감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모세의 귓전을 때린다. 하나님은 다짜고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명한다. 


본문 33절. 주께서 이르시된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그동안 모세가 어떤 신을 신고 어떤 인생길을 걸어왔는가? 모세는 노예의 신과 나그네의 신을 동시에 신고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신을 신어야 했고, 실제 죽음의 강에 버려진다. 그런데 모세는 죽음의 강에서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고 애굽 왕자의 신을 신게 된다. 애굽 사람을 쳐 죽인 일로 살인자에, 도망자 신도 신게 된다. 이후 광야에 던져진 모세는 좌절과 무기력의 신도 신게 된다. 


지금까지 모세가 어떤 신을 신었든지, 거룩한 하나님 면전에선 다 벗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누더기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포장지를 뜯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가 왜 신을 벗어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34절.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출애굽의 사명이 주어지는 순간이다. 모세 인생에 전혀 다른 차원의 이력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모세는 사명의 신을 위해 낡은 신을 벗어야 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본문 34절에 사용된 동사이다. 모세가 생애 처음 단독자로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동사를 주목해 보자.


“보고, 듣고, 내려왔노니, 보내리라”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일하시며,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저 우주 밖에서 초연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그저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확실히 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탄식 소리마저도 기도 소리로 듣고 계셨다. 하나님은 보이는 대로 보고만 계시고, 들리는 대로 듣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모세를 향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늘 주목하고 계셨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의 한숨 소리마저도 놓치지 않고 들으셨고,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시고 계셨던 것이다. 모세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시간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난 것이다. 자신의 삶속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저 멀리 우주 밖에서 뒷짐을 지시고, 이 세상을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있다. 확실히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의 괴로움도, 고통도 확실히 보고 있다. 걱정과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해 불면의 밤을 보내는 우리의 모습도 확실히 보고 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련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의 지친 심령도 확실히 보고 있다. 낙심과 좌절의 늪에 빠져 헤매는 우리의 연약함도 확실히 보고 있다. 죄악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우리의 어둠도 확실히 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소리도 듣고 있다. 한숨 소리도 듣고 있다. 우리의 작은 소리도 듣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짐에 짓눌려 절로 나오는 탄식 소리도 듣고 있다. 우리 심장과 맥박이 뛰는 소리도 듣고 있다. 우리 내면의 소리까지 듣고 있다. 우리 영혼의 떨림이 빚어내는 미세한 소리도 듣고 있다. 생각의 소리도, 마음의 소리도 듣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삶의 자리로 내려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방치하거나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를 향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내려오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시다. 황송하게도 우리를 위해 움직이시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늘 저와 여러분을 확실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시선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늘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내면의 소리까지 접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나와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마치 우리는 하나님이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설마 하나님이 보겠어, 하나님이 듣겠어.” 생각하며 거침없이 말하며, 거침없이 행동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확실히 보고 있고, 듣고 있고,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 붙들어도 우리의 삶의 내용은 분명 달라지고, 우리의 얼굴 표정과 걸음걸이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지금 확실히 저와 여러분을 보고 있는데, 저와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 내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하나님은 지금 온통 나를 향하고 있는데, 저와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확실히 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가?

 

날마다 내 곁에 머물러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음으로, 홀로, 단독자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54559 전라북도 익산시 선화로 73길 25-3 (부송동)

TEL. 063-833-4647  E-mail. ssmj2911@naver.com

2023 © 새소망교회. All Rights Reserved.

54559 전라북도 익산시 선화로 73길 25-3 (부송동)

TEL. 063-833-4647  E-mail. ssmj2911@naver.com

2023 © 새소망교회. All Rights Reserved.